본문 바로가기
  • 컴공생의 공부 일기
  • 공부보단 일기에 가까운 것 같은
  • 블로그
📚 Book/독서록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24.11)

by 정람지 2024. 11. 15.

책 봉인 완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내가 자세히 모르는 객관적으로 멋지고 잘난 사람을 가볍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러나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확실하게 해서 자신이 어떠한 우월감이나 동정으로 행동하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 속을 뒤집어놓는다.
신문 판매소 주인의 샌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짜증이 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확장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단점들에 대해서 고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닐까?

 

 

 

내가 하려는 말은 언어 가운데 가장 모호한 것이었다. 그 말이 가리키는 것에는 안정된 의미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을 여행하고 온 여행자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랑은 결국 나비 가운데 드문 색깔을 가진 종과 같아서,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결코 결정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진짜 기록해두고 오래 기억하고픈 문장들이 종종 있는데 이 책에서는 이 문장이었다.

따로 기록해 본 적도 있지만 전후 맥락과 책의 정서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사랑의 모든 언어는 과도한 사용으로 훼손되었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과도하게 사용되어 훼손된 사랑이라는 말도 이해를 못 하겠는데

사랑으로도 표현할 수 없어서 더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관계를 묘사하는 주인공의 경험이 놀라웠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와 나의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연인 사이에 실제로 일치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그 광기를 드러낸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저 여자일까?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을까? 

애초에 한 개체에게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할지도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만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 이 사람이 아니면 사랑을 할 수 없었을지? 를 고민하는 거겠지?

나도 궁금했던 부분인데,, 진짜 사랑을 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일생을 함께한 노부부 같은,, 이혼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니깐) 그 사람들이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의 기질 자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건지 궁금하다.

운명론을 믿을 수 있냐 없냐의,,, 여러 사람을 만나 봐야 할지 말지,,,

친구랑 말해 본 적도 있는데 일대다 운명론을 제기했다.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그룹이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 가운데 무엇이 진정 "진리"를 원하는가? 우리는 그 가치를 묻는다. 왜 비진리가 아니라 진리인가? 왜 불확실함이 아니라 진리인가? 심지어 왜 무지가 아니라 진리인가? 
어떤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 판단에 대한 반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문제는 얼마나 삶을 발전시키느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피안"

계속 읽는 책마다 선악의 통합, 중용, 양극단의 화합과 통합 등을 강조하고 있다.

정답이 없다는 게 정답

중도는 양쪽 끝과 같이 명확한 경계가 없어서 치우침의 정도를 알 수 없다는 게 딜레마다

미망(헛된 희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서만 그것을 믿을 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때만 해가 된다.

 

 

 

그러나 이런 라이트 모티프들은 중요했다.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깊은 관계에서는 필수적인 우리만의 별명~말투~문화 

책에서 묘사하는 이성 간의 사랑-에로스-는 가족 간의 사랑 -아가페-이나 친구 간의 사랑-필리아-과 부합하는 면이 있어서 이입을 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어떠면 우리가 존대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은다...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광이에 의해 제한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언제나 상대와 내가 서로에게 가지는 무게가 똑같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다

나는 좀 이거에 대해서 예민한 것 같기도

누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고 느껴지면 갑자기 호감도가 수직하락한다

내가 줄 수 없는 걸 바란다고 생각해서인가

이성 간에만! 친구의 애정 환영

머,,,내가 더 좋아하는 건 당연히 외롭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해주기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문제는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정말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여러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여러 무리에서 여러 정체성을 만들어둬야 한다

어디 하나에서 무너져도 다른 쪽에서 자존감을 채울 수 있도록

좋은 무리 좋은 사람 옆에 잘 끼워져 있도록 노력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쫒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래도,, 각인이 있는 세상에 태어났어야

딱 계약하면 다른 사람은 못 사랑하는거임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한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진짜,,,

다른 부분에서 화난 걸 다른 데다 표현하지 않는 게 어렵다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와,,,이게 가능한 러브스토리는 N번의 회귀와 구원 서사가 있는 소설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있다면 심층 인터뷰를 하고 싶네

 

 

 

 

낭만적 테러리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질문이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이런 연애 관계에서는 명확한 선악이 없고 호감의 차이만이 있다는 게 정말,,골치 아픈 것 같다

지속적인 문자나 관심 표시, 자기를 좀 더 가까이 해 달라는 요구, 만나주지 않으면 쫒아오는 것 모두 그들과 나의 호감 차이에서 비롯된 거고 명확한 이유와 인과관계가 없기 때문에 해결도 확실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만약 나도 비슷했다면 다 나에게도 행복한 신호였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마지막 건 좀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 없이 의무감에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그렇다면 나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원했던 호감 표시는 도덕적이지 않았군

하지만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나도 좋아하는 대상에게는 긍정적인 화답을 듣고 싶을 테니까,,,,

두 사람은 똑같은 기대를 안고 사귀어야 해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말이예요... 거기서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사랑은 본질적으로 보답받을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상호 간의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일부러 길 또는 서점을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한시적인 것으로서 끝을 맺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닥터 사베드라는 안헤도니아라고 진단했다.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생기는 것으로, 고산병과 아주 흡사하다고 규정한 병이었다.
..사랑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후반 대 절절한 이별의 순간에는 이해를 하면서 읽었지만 공감이나 이입은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모든 것에 끝이 도래하기 전에 끝내버리고 싶은 사랑은 뭘까? 

알랭 씨는 해 보셨으니까 쓴 건가

책을 읽으면서 주위 연애를 해 보는 친구들이나 이별한 친구 이별의 단계에 접어든 친구들과의 대담을 진행했는데

예상했던 만큼만 설레고 예상했던 만큼만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평탄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것 같기도 

내 님 대신 포탄 맞고 눈앞에서 죽어준 다음 환생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