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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독서록

📙이방인 - 알베르 카뮈 (23.1월 초)

by 정람지 2023. 1. 8.

다수와 다른 개인, "이방인"

뫼르소(주인공)는 사회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원칙을 거부함으로써 작중에서 이방인으로 표현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 '이방인' 첫 문장

 

뫼르소가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독백한 후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습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는 단식 기간에 밀크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눈물을 흘리지 않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확인하지도 않는다. 

다음날에 해수욕장에 가 애인을 만나고 코미디 영화를 보며,

비도덕적인 일을 하는 레몽과 친구를 하고 그가 전 애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편지를 대신 써 준다.

레몽의 전 애인의 오빠가 찾아와 난투극을 벌이다 아랍인 한 명을 죽이게 된 뫼르소는 재판장에서 그것은 '햇빛 때문에'라고 진술한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만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뮈를 '사이코패스', '감정이 없는 사람' ' 비도덕적인 사람' 등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평범한 사람 뫼르소가 '이방인'이 되는 이유이다.

 

사실 카뮈는 그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이다. 젊은 날 야망을 가지고 살았지만 삶의 무게와 한계를 느꼈고,

대학생 땐 나도 그런 종류의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학업을 포기해야만 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실제로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엄마를 부양하기 힘든 자신의 경제력과 대화 하나 없이 삭막해진 관계 속에서 엄마를 양로원에 보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나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지만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는 엄마가 없는 방을 보고 '크다'고 생각하며 분명 슬픔을 느끼지만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에 지쳐 있었다.

 

레몽의 전 애인의 오빠라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 뫼르소는 그 둘이 남매지간이 아닌 부부 사이(즉 친구와의 관계는 불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그의 친구를 위해 입을 다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미 한 번의 난투극으로 친구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지친 정신으로 다시 상대방과 홀로 마주쳤을 때,

그는 상대의 칼에 반사된 강렬한 햇빛이 자신의 눈을 찌르자 강렬한 불안으로 인해 총을 쏘게 된다.

뜨겁고 습한 날에 대한 묘사와 피로하고 불안한 그의 정신의 관점에서 그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는 절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살인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사회가 인정하는 다수의 의견이 아닐 시에 우리는 다수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우리를 연기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고 대다수가 그런 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이지만 관계에 지치고 현실에 휩쓸려 무뎌질 때도 있다. 다수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하거나 불건전하지만 이해 가능한, 내게 즐거움을 주는 친구와 사귀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다만 뫼르소는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판사 앞에서 신을 부정하고 다수의 연민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지 않고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2부에서는 재판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뫼르소의 단편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는 그를 '사회에 남겨둬서는 안 되는', 처벌을 내려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아랍인의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지고 "다수- 사회에 맞지 않는 이상한 정신과 도덕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논제만이 남아 그것이 그를 단두대에서 사형시켜 버린다.

나는 그에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다고, 절대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만을 말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 뫼르소 재판 중

 

우리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볼 수 있다. 함부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결정내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사건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며 눈을 흐리는 자극적인 상황들에 기반한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삶과 죽음

또 "이방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뫼르소는 한평생 삶에 지쳐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태도만을 보여줬다.

자신과 결혼하겠냐고 묻는 연인에게 '네가 그러고 싶다면 할 수 있고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고 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사형이 구형되자 타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삶의 끝에서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다시 시작하는 게임을 펼쳤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게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자유를 느꼈을 테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를 했음이 틀림없었다•••그리고 나 역시 몹든 것을 다시 살아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나를 열었다. 

 

우리는 자주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인지 고민하며 무기력함을 느낀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권태적인 삶의 무의미, 부조리함으로 가득 찬 인생 속에서 카뮈는 답을 말한다. 살아야 할 뚜렷한 이유를 찾아내고 의미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형수다. 삶이 의미 없다는 것을 받아들게 되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우리가 삶에서 가치를 두던 것들, 영향을 받던 것에서 사소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집착을 버리고 자유로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카뮈는 말한다. 그것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삶에 대한 반항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역시 어느 날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고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다 한들 뭐가 문제란 말일까?

 

굳이 어떠한 가치를 꼭 만들어야만 하는가? 삶이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삶의 이유가 부족해도 이를 인정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인정하면서 죽음 이후에 무가치해질 모든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이방인이 전하는 메세지이다.

내게 남겨진 소망은, 내 사형 집행이 있는 그날 거기에 많은 구경꾼들이 있고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 인생의 큰 고난과 실패를 얻어보지 못해서 공감이 아직 잘 되지 않는 내가 미래의 직장생활에 찌들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한다.

화이팅!


토론 주제

1. 구미 3세 여아 살인 사건 - 사건과 관련 없는 사람에 대한 재판(아랍인은 재판 사건에서 찾아볼 수 없음. 피해자가 가려진 부분)

- 사건 자체가 아닌 그에 얽힌 넓은 관점에서 사건을 보는 것은 마땅한가? 

2. 상식의 부조리함 - 다수의 의견/사회의 보편적인 의견(인류가 "옳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에서처럼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세계대전 크리스마스 사건처럼 긍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중심점을 찾을 수 있는가?


토론 후

 

나를/타인을 이방인으로 대했던 경험

소수자들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그 정체성 위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 자체만으로 차별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배려할 점을 생각하는 것이 맞나? 
우리가 소수자들에게 쉽게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소수자가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 더 익숙해질 수 있도록 사회가 소수자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좀 더 평등한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수의 보편적인 의견 -우리는 어디서 중심을 찾을 수 있는가?

중심은 “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절대 이기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타적이라고 칭해지는 행위도 사실은 가장 이타적인 이기주의라고 생각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감이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는 만족감 등)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내 결정의 중심을 나에게 놓고 결정하기로 했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다수에게 어떻게 생각되는지 / 사회 보편적인 의견과 관념이 어떤지에 상관 없이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힘들어질 가능성을 예상한다면 그 길은 최종적으로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는 길이므로 말릴 것이다.


 원래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이라는 전제가 있었지만, 모든 사람은 사정이 있고 사정을 100퍼센트 알게 되면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중심에 두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한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친구의 부모님이 내 친구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나와 같이 있다고 대답할 거란 의미다. (다만 장기적으로 그 친구의 부모님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 친구에게 유익하다고 판단된다면 말할 것이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다시 왔는데 아무래도 역시 확실한 건 없는 것 같다.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섣불렀다. 좀 더 공부를 해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