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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독서록

📕불안(Status Anxiety) - 알랭 드 보통 ( 12월~ 2월 말)

by 정람지 2023. 5. 19.

📚지위 불안(Status Anxiety)📚

우리는 왜 높은 지위를 가지길 열망하는가?

우리는 왜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가?


📕원인📕

📍사랑결핍

 

존중.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원형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알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 커갈수록 그것을 얻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우리는 사랑이 결핍된 상태에 살게 되고 사랑을 받기를 항상 원하게 된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다. 그들은 사회의 극빈층이 겪는 것보다 훨씬 심한 궁핍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텨낸다.

가난이나 궁핍 못지않게 존경과 존중, 명예와 사랑은 인간의 삶에 중요하다.

존엄은 거의 모두가 갈망한다.

 

사랑의 결핍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평가와 시선에 신경쓰게 된다.

우리의 '에고' 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세상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체념에 젖은 멍한 표정이 증언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에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결핍을 채움받기 원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지위가 상승하기를 갈망하게 된다.


📍속물근성

아무도 권력이나 명성 때문에 당신을 사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밑바닥에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는 증거다...권력이나 명성은 우리 자아의 진정한 알맹이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그의 반지르르한 표면 밑에서 변덕스러움을 감지하고 속물의 무리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운이 좋아 잠시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지위가 본질적 자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부, 등의 부가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여 속물근성을 부정적으로 여긴다.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남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기도 힘들다. 이 병은 애초에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두드러지는 집단의 속물근성은 모든 사람을 사회적 야심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 양 쫓아다니게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주목받는 집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 집단의 속물근성에 자신을 끼워맞추게 된다.

그런 행동은 두려움에서, 존엄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경멸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받고 존중받지 못할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속물적인 사람이 된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지나치게 화려한 가구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가구를 산 사람을 비웃기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 역사는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인간은 자신의 위치에 불안함을 느껴 자신이 무시나 외면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속물근성을 내보인다.

이건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 아닌가?


📍기대

부나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의 위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우리가 더 높고,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계급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히 정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가장 밑바닥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자유를 주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성취를 비교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자유였다. 덕분에 그들은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계급주의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계급, 내가 확실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므로 그 너머의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나름의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계급이 없어지며 비교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동등한 집단' 취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능력주의에서 이어짐)

 

시간이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자존심 = 이룬 것/내세운 것

우리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이전보다 많아졌다.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는 우리의 자존심의 하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루소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 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떄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루소의 벌거벗은 야만인은 가진 것이 저의 없었다. 그러나 타지마할에 사는 후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는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계급제는 사라졌고 우리는 누구든 될 수 있다고 모두가 말하며, 세계화와 인터넷, SNS의 발전 등으로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수많은 뛰어난 사람들을 접한다.

우리가 어쩌면 그들처럼 될 수 있었으리라고 예상하는 데서 우리는 좌절을 느낀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우리의 준거 집단이 더욱 커진 이후, 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하거나 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좌절하는 데에서 인간의 지위 상승에 대한 열망은 더 뚜렷해진다.


📍능력주의

 

과거 '부'나 '지위'는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전도를 시작한 서기 30년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미에 대하여 세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이 세 가지 이야기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첫째, 그들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둘째, 세상의 지위는 신이 보기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것,
셋째, 부자는 파렴치하며, 정당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면 서글픈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차피 존중할 가치가 없다는 것.

 

하지만 역설적으로 적당히 평등한 세상이 찾아오면서,(교육,신분,등)

"능력주의"가 대두했다.

능력주의는 부와 지위를 개인의 가치로 바로 직결시켰으며, 그 결과,

안타깝게도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괴로운 이야기 세 가지가 생겨나 앞의 이야기들에 도전하게 된다.
첫째,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둘째,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셋째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명예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과거 가난은 인간의 명예와 직결되지 않았으나, 능력주의 사회로 진화하며 낮은 지위는 신체적 고통뿐이 아닌 정신적 고통까지 짊어지게 됐다. 이에 따라 지위 상승은 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불확실성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불확실함이 지위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1. 변덕스러운 재능
:우리는 재능과 성취 능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없다.

2.
:모든 일에 운은 반드시 존재하나,
패배를 불운 탓으로 돌리는 것은 궁색해 보이며,
'승자는 운을 만든다'는 말은 현대의 주문이다.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3. 고용주
: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떄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4. 고용주의 이익
:회사가 이윤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 언제나 피고용자 숫자를 대폭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5.세계 경제

 

자본주의 세상에서, 물물교환의 작은 공동체가 아닌 철저히 분업화된 거대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경제의 부속품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욕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욕구'다.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욕구가 선택된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의 삶에서는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 들쑤시는 다섯 번째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재능, 운, 자본주의 세상에서의 부속품으로서의 나, 등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해법📕 

📍철학

이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이는 "이성"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떄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 마르쿠스 아우렐리루스 <명상록>
이름이란 게 무슨 소용인가?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져도 똑같이 향기로울 게 아닌가?
-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 마르쿠스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 철학적 이상 +
용기 무모함
인색함 관대함 낭비
격분 온화함 줏대없음
촌스러움 재치 익살
무뚝뚝함 친근함 아부
지위에 대한 무감각 의욕 지위 집착/히스테리

공자가 말한 중용의 미덕처럼,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하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쇼펜하우어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내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을 자기 확신(고집이 아니라)이 필요하다.

성찰과 공부를 통한 나만의 "이성"을 가지기 위해 노력

 


📍예술

예술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 알려준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

이 책의 주제나 교훈 이런 걸 벗어나서 딱 마음에 들어온 한 구절이라면 저거다. 알랭 씨는 시인도 했어야 했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 조지 엘리엇
예술적 매체는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모든 드러나지 않은 삶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극>

실패의 물질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지목하는 집요한 경향에 대한 두려움 떄문에 더 심각해진다.
"패배자"라는 말은 졌다는 의미와 더불어 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권리도 상실했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 냉혹한 말이다.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리어 왕, 오셀로, 안나 카레니나, 등의 유명한 비극들이 있다.

예술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실패자가 우리에게 고귀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자질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그들의 창조자나 기록자가 그렇게 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특히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이 있다....파국을 맞이한 사람들-..-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비극은 현실에서 패배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공감'을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비극은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비극 작품은 재앙을 피하는 우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재앙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따라서 극장을 나설 때면 쓰러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우월한 태도로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 예술에 담긴 교훈을 받아들인 세계에서는 실패의 결과가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문장을..아주 아름답게 쓰는 것 같은데..영어로도 한 번 보고 싶다

 

 

<희극>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 존 드라이든
우리는 농담을 통해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활용할 수 있다...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세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
- 프로이트

희극, 풍자와 웃음을 통해 우리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정치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왜 어떤 사회에서는 군인이 찬사를 받고(11-16세기 서유럽,등),
다른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신사가 찬사를 받는가?(18-19세기 잉글랜드)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지 못하는 집단은 지위를 잃게 된다.

사회의 주 권력층은 계속 바뀌어 왔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집단들이 스스로 존엄을 얻고자 이전 체제에서 이익을 보던 사람들과 맞서 공동체의 명예 체제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 현재의 지위 체계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정치적 정신은 예의와 전통을 벗어버리고, 거리낌 없이 반대의 입장에 서서,아이처럼 순수하게 그러나 법정에 선 변호사처럼 완강하게 묻는다. "꼭 이래야 하는가?"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기독교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우주를 덕질하세요!

"낙관적 허무주의"  kurzgesagt의 영상을 인상 깊게 봤었다.

무한, 영원, 또 단순하게 또 어쩌면 가장 유용하게 신이라고 하는 힘에 대한 경외감에 밀려나게 된다.

이 밖에도 광대한 풍경, 폐허는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우주도~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사람들이 종교로써 뭉칠 때?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기독교에 봉사하던 천재적인 화가와 장인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의 가치에 영속적인 형태를 부여했으며, 돌, 유리, 소리, 말, 이미지를 어루만져 그런 가치들이 현실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바니타스 미술" -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을 가진 예술이다.

예술과 압도적.절대적 존재와의 결합인가?

사랑, 선, 신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

📍보헤미아

프랑스인이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하더라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간단 정리📚

 

우리는 지위 불안을 느끼며 지위 상승을 원한다. 

 

왜?

1. 인간은 사랑에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결핍을 채움받기 원한다. 

2. 신분제 폐지와 세계화 등으로 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하는/ 되지 못해 절망할 수 있는 준거 집단이 커졌다.

3. 능력주의 사회로 진화하며 낮은 지위는 신체적 고통뿐이 아닌 정신적 고통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4. 우리의 변덕스러운 재능, 운, 자본주의 세상에서의 부속품으로서의 나, 등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1. 나만의 "이성"을 통해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과 중용을 가져라.

2. 예술을 통해 외면받은 사람들(실패자)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3. 우리는 정치를 통해 현재의 지위 체계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4. 압도적인 것에 대한 경외감을 통해 우리는 낙관적인 허무주의를 느끼고 지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5.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지위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다.